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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프랑스 미인 샤를7세의 공식 정부 아녜스소렐

by 친절한미소 2024.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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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사를 읽다 보면 정말 재미있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아무런 상식이 없어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알 정도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정말 유명한데 르네상스라고 해도 이탈리아와 북유럽(벨기에, 독일,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차이를 보인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원근법과 소실점을 중심으로 한 정돈되고 세련된 느낌이라면 북유럽의 르네상스는 디테일한 표현과 감정이 살아 있는 극적인 작품이 많다.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지는 교회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회화를 느끼려면 제대화를 꼭 봐야 한다. 

 

 

제대화란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펼쳐 놓는 미술 작품인데 당시에는 굉장히 시각적인 효과가 강렬했던 작품으로 교회에서는 돈을 받고 작품을 공개하였다고 하며 대축일 같은 큰 행사 때는 제대화를 모두 펼쳐 놓아 신앙심을 고취 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성스러운 제대화에 성모마리아의 얼굴로 영원히 남아 있는 왕의 정부가 있다. 바로 아녜스소렐이 그 주인공이다. 우선 그녀가 성모 마리아로 분한 제대화를 보자.

 

 

 

 

 

출처 : 위키피디아(믈룅 제대화)

 

 

이 그림속 주인공이 아녜스 소렐이다. 그녀는 당시 미의 화신이었다. 백옥같은 피부에 아몬드 형태의 푸른눈, 금발에 날씬한 허리의 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잔다르크 시절 프랑스 왕이었던 샤를7세의 정부로 정부임에도 공식적인 명칭과 직위를 얻고 정치적, 외교적으로 힘을 행사한 사람이다. 

 

 

샤를7세는 백년전쟁을 종식한 왕인데 잔다르크를 나중에 토사구팽 하면서 이미지가 안좋은 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샤를7세는 아녜스 소렐을 정말 좋아해서 그녀에게 온갖 선물과 성을 주었다. 아녜스 소렐은 미인일 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정치적 감각도 갖고 있어서 샤를7세가 정치에 집중할 수 있도록 왕을 잘 이끌었다고 한다. 샤를7세의 애인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사랑 받은 사람은 아녜스 소렐이었고 샤를 7세의 자녀를 셋이나 낳았다. 그녀는 28세에 사망하였는데 당시 그녀의 뱃속에는 샤를 7세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사 해보니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샤를7세의 아들이 암살했다는 얘기도 있고 평소 진한 화장을 즐겨했던 그녀가 수은중독으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녀는 샤를7세만 허용되었던 다이아몬드를 목에 걸고 궁전을 돌아 다녀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당시 다이아몬드는 왕에게만 허락된 보석이었기에 그녀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왕의 총애가 깊었고 그녀의 존재를 인정해준 것이다.

 

 

들리는 얘기로는 가슴을 깊게 판 드레스를 입고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하거나 한쪽 가슴을 드러내놓기도 하고 아예 양쪽 다 드러내놓고 다녔다고 하는데.. 뭐,,, 그녀를 시기한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일 수도 있고.. 그러나,, 서민들 한테는 인기가 좋았던 듯 하다.

 

 

아무튼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성모마리아의 얼굴로 그녀는 평생박제가 되었고 진짜 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녔는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그림은 한쪽 가슴을 드러낸 그림이 많다. 

 

 

프랑스이던 조선이던 특이했던게.. 정실 부인 외에는 다른 첩을 두는 것이 상류층에서는 일반화 되었으면서도 그것을 공식화 하는 것은 손가락질 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왕실의 애첩이라도 정식 자격을 받은 사람은 공식적인 직위를 받으며 외교, 정치면에서 영향력을 크게 행사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프랑스 왕실 역사상 이 자격을 받은 사람은 3명에 불과했으며 그 시초가 샤를7세의 정부 아녜스 소렐이다. 없는 직위를 만들어낼 만큼 그녀는 총명하고 아름다웠으며 처세술이 대단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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