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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유대인학살 생존자 죽음의 수용소에서

by 친절한미소 2024.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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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비극은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 악명 높은 곳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입니다. 유대인들을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키고 가스실에서 집단학살을 하며 심지어 그 유해로 비누를 만들었다고 하죠... 

 

아우슈비츠에 끌려간 정신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빅터 프랭클인데요.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4년 동안 아우슈비츠와 다른 수용소 두 곳에 수용되었으며 결국 살아남아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로고테라피라는 학파를 만들었습니다. 

 

 

 

빅터 프랭클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에서 정신과 의사로 지내다 수용소로 끌려갔는데 여동생만 남기고 부모님과 아내 모두를 잃었습니다. 당시에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자녀는 없었던 것 같아요.

 

아우슈비츠에 끌려가고 이틀째 되던 날이 부인의 스물네번째 생일이었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간부들의 시끄러운 술자리 음악 소리에 잠자리에 누워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하죠. 

 

그는 수용소에서 경험한 자신의 정신세계를 토대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씁니다. 

 

 

 

 

 

 

 

 

 

프로이드는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음식을 주지 않으면 '음식에 대한 갈망' 외에는 남지 않아 인간은 모두가 똑같아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수용소 모두에게 닥친 극한의 굶주림 속에서도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본성을 더욱 드러내더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유대인 그러나 지배자 악랄한 카포

 

 

같은 유대인이지만 지배자 위치에 있는 카포는 매우 악랄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앞잡이가 생각나는군요. 순사도 조선인순사가 더 지독했다고 하죠. 

 

카포는 독일인들이 선발하는데 기본적으로 그들의 인성을 보고 카포에 적합한 인물을 골라내었다고 합니다. 

 

 

 

 

 

희망이 없는 수용소에서 자살이 없다?

죽음이 일상이고 극한의 굶주림과 폭언, 폭행이 난무하는 수용소에 자살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곳에서도 인간성은 살아 있었습니다. 

 

삶의 희망이 없었던 그 곳에서 자살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영양분이 부족해 내장에 축척된 단백질까지 모두 소진하여 뼈와 가죽밖에 안 남은 사람들임에도 기상나팔에 일어나 일하고 저녁에 돌아와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냈음에 안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스스로 삶의 의지를 내려 놓은 사람은 바로 희망이 없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종종 이런 이들은 자신의 오물이 가득한 그곳에서 아무리 때리고 소리를 질러도 일어나지 않고 누워만 있다가 주머니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은 담배를 피우고 스스로 삶을 내려놓았다고 하죠.(담배는 수용소에서 화폐처럼 필요한 것을 바꿀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힘든 노동을 하였을 때 그 대가로 담배 몇 개비를 얻었고 그 담배로 수프를 더 먹을 수 있었다고 하죠. 그래서 담배를 얻은 수용자들은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며 아껴서 사용했지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담배를 피우는 일은 잘 없었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삶의 의지가 없어졌음을 의미해 주변 사람들은 담배 피우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 곧 있으면 죽겠군'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인생이라 생각하라

 

 

수용소에도 유머가 있고 예술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어떠한 환경이라도 적응하고 살아남습니다. 

 

그것이 지금 인류가 단일종으로 지구상의 다른 종을 압도하게 된 힘이 아닐까요. 영하의 추위에 늘 젖은 신발을 신고 다녔고 추위에 떨며 노역을 해도 살았습니다. 

 

노역이 익숙해지는 순간이 찾아오면서 몸은 고된 노동을 하지만 정신은 다른 세계에 가 있는 경험을 합니다. 

 

빅터 프랭클은 철로 공사에 동원되어 얼은 땅을 파내려 가면서도 아내의 웃는 모습을 보고 그녀와 대화를 나눕니다. 그것이 그에게 힘을 주고 새로운 희망이 되어 하루를 살아가게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 삶이 두번째 인생이라고 생각하라'라고 조언합니다. 

 

웹툰을 보면 회귀물이 많죠? 

 

 

 

 

'내 남편과 결혼해 줘'라는 드라마도 회귀물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두 번째 삶이라고 생각하면 가장 먼저 내가 놓치고 있었던 소중한 의미를 알게 됩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에 집중하느라 나를 진정으로 아껴주는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한 지난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합니다. 

 

지금 삶이 두 번째 삶이라고 생각하면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더 단단하게 와닿게 되겠죠.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 안에서 집단 심리 상담을 했는데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수용자들에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외국에 있는 자녀'를 깨우쳐 주기도 합니다. 본인은 수용소에 끌려오기 전 출판하려고 했던 원고가 바로 그의 삶의 의미가 됩니다. 그는 살아 나가면 책을 출판하고 싶어 했거든요. 그래서 틈틈이 메모지에 원고를 떠올려 썼습니다. 처음 썼던 원고는 수용소 끌려올 때 다 빼앗겼기 때문에 없었습니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

우습게도 모든 것이 편안해 졌을 때 삶의 의미가 없어지기도 합니다. 이제는 무엇 하나 불편한 게 없는데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하기도 하죠. 

 

어려움은 비극입니다. 하지만 그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고 번역하였지만 어려움은 곧 삶의 의미가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방법이 없지만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내 삶이 의미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 의미가 자식이든 출판하지 못했던 원고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어요. 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면 그게 바로 삶의 의미입니다. 

 

 

 

 

 

 

삶의 의미가 점차 작아진다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권하고 싶습니다. 켈리최 회장이 깊은 우울함에 빠져있을 때 '엄마'를 떠올리며 힘을 냈다고 하죠. '세상에서 제일 예쁜 딸'이라고 늘 칭찬하던 엄마를 생각하며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힘을 내서 움직였다고 합니다. 

 

지금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면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 생각에 나온 대답대로 살면 될 것 같아요. 그게 바로 삶의 의미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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